+ 리필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국·시인, 1946-)
+ 인생
인생이란 사람이 살았다는 말
눈 맞는 돌멩이처럼 오래 견뎠다는 말
견디며 숟가락으로 시간을 되질했다는 말
되질한 시간이 가랑잎으로 쌓였다는 말
글 읽고 시험 치고 직업을 가졌다는 말
연애도 했다는 말
여자를 안고 집을 이루고
자식을 얻었다는 말
그러나 마지막엔 혼자라는 말
그래서 산노루처럼 쓸쓸하다는 말
(이기철·시인, 1943-)
+ 인생
인생은 짧고,
당신의 아이들이나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일도 당신 곁에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생은 너무 짧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최대한 그들의 모습을 즐기고,
시간 있을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 나의 가족,
친구들의 존재를 즐긴다.
(돈 미겔 루이스·멕시코 작가)
+ 生
찬 여울목을
은빛 피라미떼 새끼들이
분주히 거슬러오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등에 아픈 반점들이
찍혀 있다.
겨울처럼 짙푸른 오후.
(이시영·시인, 1949-)
+ 글쓰기
뭘 하느냐구요?
빛을 만들고 있어요.
어두워서,
자칫하면
어두워지니까.
나의 안팎
자칫하면
어두워지니까.
(정현종·시인, 1939-)
+ 향기
상큼하게 스쳐 오는
봄 향기 유혹에
문을 나선다.
어김없는 대자연의 순례
나는 또 언제 어떻게
때묻은 일상을 다 씻고
향기로 내 문을 닫을까
(윤보라·재미 시인, 전남 완도 출생)
+ 옷
목욕탕에
스님이 목욕하러 오셨네.
옷을 다 벗으시니
빼빼 말라서
온몸에 주름살이
쭈글쭈글.
스님 진짜 모습이
그거예요?
아니다.
이것도 벗어야
진짜지.
(남호섭·시인, 1962-)
+ 개망초
가뭄에도 몸을 낮추어 견디고
목이 타는 햇볕에도 꽃을 피우는 개망초를 보며
이제 삶을 더 사랑하기로 했다
외진 곳이나 바로 서기에 불편한 곳에서도
말없이 아름답게 피는 개망초를 보며
인생을 더 긍정하기로 했다
보아라, 비탈진 산하에서도
고개 끄덕이며 사는 것들은 다 아름답지 않은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리며
낮은 곳에서도 꽃을 피우는 개망초를 보며
편편한 들판이 아니라 해도
가지런한 논둑이 아니라 해도
다 받아들이며 살기로 했다.
(김윤현·시인, 1955-)
+ 후회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가을은 황홀하다.
매달리지 않고
왜 미련 없이 떠나가는가.
태양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황혼은 아름답다.
식지 않고
왜 바다 속으로 잠기는가.
지상에 떨어져
꺼지지 않고 잠드는
불꽃이여,
우리도 능금처럼 태양처럼
스스로 떠날 수는 없는 것인가.
가장 찬란하게 잠드는 별빛처럼
잊을 수는 없는 것인가.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오세영·시인, 1942-)
+ 낮달
삶은 너무 정면이어서 낯설었지요
목이 메어 넘어가는 찬밥처럼
숭고하고도 눈물났지요
그림자를 휘적거리며 전봇대처럼 외로웠지요
슬픔도 오래되면
영혼이 밝아진다구요
생은 박하사탕 같아서
그렇게 시리고 환했지요
(권대웅·시인, 1962-)
+ 삶
여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가야할 길은 멀어요
내 안의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나를 이끌어요
본성에 적합하지 않은 삶은
삐걱거리고 비틀거려요
목적과 과정에
즐거움과 평화가 있는 삶을
찾아 갈래요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갈래요
(은복 김현옥·약사 시인)
+ 무엇이 그리하게 하는가
무엇이 그것들을 그리하게 하는가
바다에 고기들을 헤엄치게 하는 것
공중에 새들을 날게 하고
숲에 짐승들을 치닫게 하며
물의 흐름을 제 길로 가게 하는 것
무엇이 그것들을 그리하게 하는가
굴러가던 왕의 수레를 쓰러뜨리는 것
온갖 생령의 숨을 때없이 멎게 하며
쏜 화살을 과녁에 머물게 하고
나무며 바위들을 제자리에 있도록
무엇이 그것들을 그리하게 하는가
고기들은 알지 못하고 헤엄친다
새들도 알지 못하며 날고
왕도 수레도 화살도 나무도 바위도
목숨을 지니고 안 지닌 모든 것들은
무엇이 그것들을 그리하게 하는가
그 하나도 온통 알지 못하고
우리 또한 끝내 알 수 없다.
(인태성·시인, 1933-)
+ 가지치기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생각이 길면 일이 안 된다
가위와 톱을 들고 한 바퀴 돌아보고
큰 가지를 잘라낸다 지난해
바람에 찢어진 가지가 말라 있다
너무 가까워도 볼 수가 없어
꽃눈이 온 자리의 간격을 확인하고
웃자란 곁가지와 잔가지를 쳐낸다
빛은 어느 곳이든 드나들 수 있지만
바람이 통하는 공간 확보도 중요하다
돌아보니 마음을 비운다고
밑동까지 자를 순 없지 않은가
사랑한다고 꽃눈마다 열매 달 수도 없다
달콤한 열매 하나 제대로 먹으려면
거름부터 주어야 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내 마음에 나무 한 그루 환하다
(조인선·시인, 1966-)
+ 얼마나 가슴으로 살고 있는가?
내 삶은 타고 남은 초가 아니다.
인생을 완전히 불태운 사람으로
세상을 떠나고 싶다.
나는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잘 살았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 말을 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
지금 이 순간 삶의 한가운데로
그 말을 끌어내자.
(알렌 코헨·미국 작가)
+ 인생은 그대의 작품
그대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대를 고통스럽게 할 수 없다.
그대의 모든 인생이
그대의 작품이며 그대의 창조물인 까닭이다.
일단 이 사실을 이해하면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대는 어디서나 즐길 수 있다.
다른 관점에 섬으로써 그대는
지옥을 천국으로도 바꿀 수 있다.
그대는 즐거움을 누려보고 고통도 겪어 보았으며,
고뇌와 황홀, 사랑과 증오, 분노와 연민,
성공과 실패 등 모든 것을 겪어 보았다.
높은 곳에 오르기도 하고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도 하면서
삶의 온갖 경험을 겪어 보았다.
그대가 이런 경험들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오쇼 라즈니쉬·인도의 신비가이며 소설가, 1931-1990)
+ 꽃잎
꽃잎만큼만
살고 싶어라
솜털처럼 가벼운
나비의 애무에도
견디지 못해
온몸 뒤척이다가도
세찬 소낙비의
앙칼진 강탈에는
그 여린 몸뚱이로
꿋꿋이 버티어 내는
저 꽃잎처럼만
살고 싶어라
가볍게,
하지만 가끔은 무겁게!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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