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정신 서려있는 두 비석은 간데없고, 초라한 초막 한 채만 외롭게…
시간 없다며 일송정을 차창으로만 보라니…너무 화가 나서 가이드 호통
겨우 둘러보기로 했는데 이번엔 기름값 아낀다며 먼 발치에 주차 "어이없고 통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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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 출생으로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지용 시인이 있다.
1940년대 소설가 이태준과 함께 문장(文章)을 창간한 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을 발굴하는 등 공적이 큰 시인이며, 가수 이동원씨가 불러 다시한번 한국민의 정서를 고양시켜준 시 '향수'를 썼기도 했다. 미당 서정주와 함께 한국 대표시인으로 쌍벽을 이루고 있기도 한 그를 기리는 행사가 출생지인 충북 옥천뿐만 아니라, 중국 연길에서도 해마다 개최되고 있다. 이는 한중 국제교류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 정신사를 재조명하는 뜻 있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바로 한국지용회에서 연변 지용문학제에 한국 문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한민국 예술원회원인 시인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학술원회원인 문학평론가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 시인 이근배 지용회회장, 문학평론가인 최동호 고려대교수, 박태상 한국방송통신대교수, 김성우 한국일보 논설위원, 문정희 시인, 필자 등 20여명이 참가했다. 한·중 국제세미나와 정지용세미나, 지용음악제 등이 다채롭게 펼쳐졌다.
이튿날은 백두산 가는 길이었는데,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
백두산에 다와 갈 무렵 어느 노점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깊은 산골짜기라 밤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맑게 반짝이며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온 듯했다. 산도적떼라도 튀어나올 듯한 적막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노점상은 산나물류를 파는 곳이었다. 저 무수한 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을 보고 나는 일제치하 이곳에서 독립운동하다 숨진 영혼들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백두산에서 내려와 연길로 돌아오는 길목에 양봉을 하면서 꿀을 팔고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김용직 교수가 그냥 지나칠 수 없다해서 관광버스에서 모두 내린 것이다. 한국문인 학자 20여명과 방송통신대에서 온 주부학생 30여명과 함께 우리는 나란히 서서 잠시 묵도를 올렸다. 이곳 청산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없이 숨져간 수많은 애국영령들에게 올리는 기도였다.
◇ 일송정 가는 길
다음날, 일송정으로 관광을 가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일송정에 다와 갈 무렵 휴게소에서 내려 식사를 하고 그곳 상점에서 2시간 남짓 시간이 남아돌만큼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는 다시 관광버스에 올라 일송정을 향했는데 20대 초반 연길 조선족 젊은 아가씨 가이드는 시간 관계상 일송정은 차창으로 보고 도문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정표의 프로그램에도 명시되어 있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며 반문했더니 차창으로 보는 것도 보는 게 아니냐고 했다. 나는 일송정을 여러번 올라봤지만 다른 분들은 한국에서 자주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한 마디로 야단을 쳤다. "네가 우리 일행을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이 버스속에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명성을 가진 어르신들이 계시는데 무례를 범하구나!"
야단 때문인지 일송정 아래까지 가서 버스를 주차하고 일송정 관광을 하긴 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딱 30분이었다.
답답한 자가 샘 판다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다들 허겁지겁 산길을 거슬러 일송정에 올랐다. 그런데 고지식한 안동출신의 김용직 교수가 시간이 다 되어간다고 재촉했다. 나는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하며 굽이치는 해란강을 내려다 보았는데 시간 관계상 일송정 노래비가 있는 곳까지 다들 가보지 못하고 내려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쪽을 바라보니 다른 관광버스는 여러 대 주차해 놓고 있었다. 뭐든 불의이다 싶거나 올바르지 못하면 도저히 가만 있질 못하는 성격이라 나는 또 항의했다. 관광버스가 왼쪽 산길로 조금만 돌아 올라가면 힘겹지 않게 일송정도 오르고 일송정 노래비도 볼 수 있는 데도 기름값이 더 들어가니 일송정 휴게소 앞에 주차했다는 것이다. 기가 차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39년 조선일보 간도지국 지국장을 지낸 바 있는 소설가 강경애 문학비도 일송정을 돌아오르는 산길에 세워져 있었다.
다시 관광버스는 도문 두만강 공원으로 향했다. 역시 이날 밤 연길공항으로 가서 여객기 타고 북경으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 뒤 북경공항 대합실에서도 일어난 일이지만 1주일 내내 침묵하고 계시던 김용직 교수가 야단을 쳤다. 한국 관광객들이 민족정신을 알고 동포애를 알기 위해 오는데 "20대 초반 한창 커가는 나이에 돈에 눈이 멀어 인륜도 모르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여성가이드를 꾸짖자 급기야 그녀가 눈물 흘리며 사과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말 그대로 열심히 사진이나 찍어대며 관광만 하고 그냥 지나치겠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해란강 누이가/일송정을 올려다 보며/ '오라버니, 하늘이 너무도 맑아요!'/하니, 일송정 오라버니는/ '누이가 비치고 있는 치마물결/ 역시 너무나 곱네!'/하며, 둘이는 온종일/정다운 오누이가 되어 있었다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심사(心思)로 '일송정과 해란강'이라는 시를 써서 읊었거늘, 그러나 일송정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웅혼한 독립정신사가 되어준 노래비 '선구자'는 간 곳 없고 새로운 비석으로 교체되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입만 굳게 닫고 있을 뿐 소상히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언론에서나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중국 조선족 언론에서는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성격인 것으로 보인다.
◇ 선구자 노래비도 사라지고…
필자는 여러 번 일송정에 올랐다.
한국에서 태극기까지 준비해 가서 일송정 누각에서 휘날리기까지 했다. '일송정(一松亭)'이라는 중간에 비석이 있고, 그때는 왼쪽에는 이원수의 노래비 '고향의 봄'이 놓여 있었으며 오른쪽에 놓여있던 '선구자' 노래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왼쪽에는 '비암산 진달래'라는 새로운 비석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오른쪽에는 '용정찬가'라는 일송정을 상징하거나 독립정신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비석으로 교체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곁에 나그네를 쉬어가게 하는 '선구자의 집'이라는 초막의 찻집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마음을 달랠 일이다.
할 말은 없다. 또한 말해봐도 소용 없는 일이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치하는 땅이지, 대한민국의 땅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선구자의 노래를 지은 윤해영과 조두남을 두고 친일파 운운한다. 어떻든 간에 한민족의 정서와 기개, 그리고 독립정신을 잘 살려낸 당대의 노래라는 점에서 부정할 수 없는 민족의 노래임엔 분명하리라. 원래 '용정의 노래'로 지어졌다 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소시민적인 가사보다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담은 내용으로 바꾼 것도 옳은 일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지금 새로 교체된 '용정찬가'는 한민족의 웅혼한 독립정신이나 민족정서가 담기지 않은 그냥 평범한 내용의 시비로 세워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제치하의 치열했던 한민족 정신사는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비암산 일송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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