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머플러' 두른 아이들 보며 끝내 눈물이…'김일성 찬양' 교사 보고는 어안이 벙벙
색동저고리 곱게 차려입은 천진난만한 소학교 아이들
같은 동족 한 핏줄인데 태어난 곳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나라의 사상을 보고 듣고 배워야 하니…애통하고 통곡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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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에 갔을 때의 일이다.
'장백'은 백두산 바로 아래 첫동네라 불리는 곳으로, 조선족들이 집단으로 사는 조선족자치현이다. 북한의 혜산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강폭이 아주 좁아 너비가 불과 20여m밖에 안 되는 개울을 연상케 할 정도로 북한땅과 아주 인접해 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양강도 혜산시와 삼수군 김정숙·김형직군과 마주하는 변경 지역이자, 길림성 남부 조선족의 문화중심지이기도 하다.
발해시대에 세워진 영광탑이 있는 탑산에 오르면 압록강 건너 혜산의 보천보 전투승리기념탑이 첫눈에 들어온다. 1936년 6월4일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단(사단장 김일성)의 장병 200여명이 한밤에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 삼림수비대를 습격하여 일본군 2명을 죽이고 소총 몇 자루를 노획한 전과에 불과했다.
송강하에서 오전 9시40분에 출발하여 장백에 도착한 것이 오후 1시50분이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제2실험소학'이었다. 이 소학교 미술교사로 있으면서 시·소설·평론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는 황영성씨와의 만남은 동행한 친구 소설가 박명호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제2실험소학'이란 조선족학교라는 뜻이며, '제1실험소학'은 중국한족소학교 특히 장백현은 조선족자치현이기에 조선어를 위에 쓰고 중국어를 아래에 쓰는 간판이 눈에 띄어 친밀감을 주었다. 황씨를 만나기 전 우리 일행은 아예 제2실험소학을 찾아갔는데 우리의 시골 초등학교처럼 초라했다. 학교 건물은 일제시대에 지은 것처럼 오래 되었으며, 벽보판도 있었는데 칠판에 여러가지 색깔의 분필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놓았다.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이 신기하게 보이는 듯 쳐다보고 바라보고 하다가 말문을 연 중년의 아주머니가 있었다. 알고보니 이 학교 교사였다. 시골 학부모나 밭에서 일 하다 온 차림처럼 느껴졌다.
황씨는 몇 해전 '북한미술대전'에도 뽑혀 참가한 우수화가로 중국 동북삼성 일대 신문과 잡지에 삽화를 그리고 있는 열정적인 젊은 예술가였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황씨의 조선족여인상은 우리의 잊혀져 가는 옛모습을 재현해 주고 있어 훈훈함을 느낄 수 있었다.
◇ 색동저고리 입은 어린이
우리 일행은 한참을 소학교에서 보냈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색동저고리 한복 입은 어린이가 보였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목에 붉은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그 붉은 머플러는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이념의 표상이었다. 한없이 슬퍼졌다. 누가 저 붉은 머플러를 벗어던져 주겠는가.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른 채, 줄넘기를 하며 발 맞추어 공중으로 풀쩍 뛰는가 하면 빙빙 돌아가며 게임을 하고 있다. 우리와 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말을 건네고 하는 데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알고 보니, 소학교는 며칠전 개학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3월인 새봄을 맞아 새학기가 시작되는데 중국 동북삼성에서는 8월이 다 가기전 새학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복도를 지나치다가 복도벽 게시판에 붙여놓은 숱한 인물들의 사진과 행적이 눈에 띄었다. 이 역시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로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즉, 한국에서는 세종대왕, 을지문덕, 안중근…, 이런 위인들의 사진이 어린이들에게 애국심을 키우는데, 이곳 소학교 벽면에는 모두가 중화인민공화국 위인들로 메워져 있다는 것. 또 그 모두가 중국 공산당 투쟁열사 위주였다. 예를 들면, 황계광(黃繼光)은 6·25전쟁때 중국 인민지원 특급영웅이며 동존서(董存瑞)는 중국인민해방군 전투영웅, 인소운(印少云)은 중국인민해방군 일급영웅, 백구은(白求恩)은 캐나다 여성으로 국제공산주의 전사다. 이런 것을 보고 듣고 배우는 소학교 어린이들이 중국인 학생이라면 몰라도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한민족 어린이들일진대, 운명이 달라서 다른 나라의 위인을 흠모하고 따라가는 교육을 받아가며 성장해야 되니 이 얼마나 엄청난 슬픔이며 막을 수 없는 과오란 말인가.
◇ 중국 공산당 홍보용 벽보로 변한 교실 게시판
이 뿐만이 아니었다. 소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길게 세워져 있는 벽보판 칠판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슬픔이 있었다. 칠판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이나 모든 내용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사상교육 그대로였다. '1999. 제18기 흑판보'가 그것인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수령 모주석께서는 호남성 소산에서 태어났어요. 모주석께서는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매우 즐겼어요. 그는 혁명의 큰뜻을 품고…'를 비롯, 리홍지와 법륜공을 철저히 배격 비판하자는 내용에서는 '리홍지는 법륜공이란 것을 조직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씌워준 죄인이에요. 리홍지는 법륜공을 하면 죽어서 천당과 서방극락세계에 간다는 황당한 론조를 퍼뜨렸고…'. 이렇듯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한 비판적 내용들로 메워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벽보판을 담당·장식하는 교사가 미술교사 황씨였다.
우리가 만난 그는 남달리 김일성 우상화의 찬양론자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함께 탑산에 올랐을 때 북한 혜산을 바라보며 그는 스스로 감동하며 '위대한 김일성수령'을 외치며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었다. 나도 어디 가면 열변을 토할 땐 거침이 없는데 그는 나를 능가하는 것 같았다. 왜 모택동도 김일성에 비하면 별것 아니고 한국의 대통령의 경우도 김일성의 위대함에 비교도 안 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었다. 북조선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가 하면, "벌어먹는 직장 주지요, 사는 집 주지요, 이것만 보더라도 지구상에 이보다 더 행복한 나라가 어딨냐" 는 것이었다. 그의 논리는 명명백백하여 비집고 들어갈 틈마저 없었다.
이를 예견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장백으로 흘러들어오기 전 장백에 가면 황영성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준 분이 있었다. 길림의 잡지사 '도라지'의 소설가 고신일 선생인데, 자신의 제자가 장백에 있는 그라는 것이었다. 가서 만나되 생각이 아주 다르니 미리 알고 가라는 것과 그가 무슨 말을 하던 반박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조용히 듣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철저한 북한사회주의 사상의 첨단을 걷고 있었으며 그 그늘을 걷어낼 길이 없음을 안 우리 일행은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에게 조금은 '짠한' 구석이 있었다. 떠나간 첫사랑의 상처를 받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간다는 것과 이곳 장백은 우범지대이기 때문에 밤이 되면 절대 혼자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누가 노크해도 밤에는 숙소의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특히 낯선 여자일 경우 마구 혐의를 덮어씌워 잡아간다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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