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선경같은 봉래각과 연대)
인간의 극락으로 불리우는 산동(山東, Shandong) 연대(煙台, Yantai)의 봉래각(蓬萊閣)에는 신선들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한다. 려동빈(呂洞濱)을 비롯한 8명의 신선이 이 곳에서 술을 마시고 바다위를 날아갔다는 이야기 "팔선과해(八仙過海)"는 거의 모든 중국인들이 아는 내용이다.
1061년에 세워진 봉래각은 황학루(黃鶴樓), 악양루(岳陽樓),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중국의 4대 명루로 인정된다. 아찔한 절벽위에 세워진 봉래각은 파도를 밟고 서서 비경을 연출한다.
(사진설명: 봉래각의 황혼)
거대한 고건물군락인 봉래각은 미타사(彌陀寺), 용왕궁(龍王宮), 천후궁(天後宮), 봉래각, 삼청전(三淸殿), 려조전(呂祖殿) 등 6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고 낮은 이런 건물들이 운치있는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의 선경 봉래각을 형성하고 있다.
그 중 봉래각 건물은 2층 목조건물인데 붉은 창틀에 날아갈듯한 처마, 그림이 그려진 기둥으로 소박하면서도 장관이다. 봉래각에 올라 사위를 둘러보면 발아래에 물안개 설레고 건물들이 안개속에 보일듯 말듯해서 정말로 선경이다.
(사진설명: 봉래각과 파도)
봉래각 동쪽의 봉래수성은 중국 최초의 군항으로서 산을 업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부두와 포대 등 군사시설을 보전하고 있다. 봉래각의 서쪽에는 황해와 발해의 분계선으로 불리우는 산마루 등주갑(登州岬)이 있다.
연대에는 또 신선들이 사는 섬도 있다. "바다위에 선인의 산이 있어 한 순간에 사라졌어라"는 이백(李白)의 시와 소동파(蘇東坡)가 바다위의 산들을 바라보면서 "정말로 신선의 저택이구나"라고 감탄한 그 산이 바로 장도(長島)이다.
(사진설명: 새섬)
일명 장산(長山)제로도로 불리우는 장도는 32개의 작은 섬으로 무어졌고 항만과 암초, 산과 파도를 비롯해 많은 명소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는 만여마리의 새들이 하늘을 덮는다고 해서 이름하는 조류의 왕국, 만조도(萬鳥島), 대나무가 많아 수려한 강남의 경치를 보여주는 죽산도(竹山島), 만여마리의 독사가 살아가는 뱀의 왕국 소흑산(小黑山)섬, 돌들이 다양한 벽화의 세계를 만드는 섬 등이 있다.
임해(林海)공원은 산봉과 백사장을 가지고 있는데 산에는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고 건물이 조화를 이루며 만경창파에서는 돛배들이 아름다우며 흰 백사장과 푸른 바다가 한 눈에 안겨온다.
(사진설명: 구장애)
구장애(九丈崖)와 월아만(月牙灣)은 또 다른 경관이다. 구장이나 높은 절벽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 보면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면서 우레같은 소리를 내고 부서지는 바닷물이 하얀 눈같이 쏟아져내린다.
월아만은 특히 반들반들한 자갈로 유명한 곳이다. 이 곳의 자갈은 반들반들하면서도 영롱한 오색으로 찬란하다.
(사진설명: 새섬)
일명 장산(長山)제로도로 불리우는 장도는 32개의 작은 섬으로 무어졌고 항만과 암초, 산과 파도를 비롯해 많은 명소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는 만여마리의 새들이 하늘을 덮는다고 해서 이름하는 조류의 왕국, 만조도(萬鳥島), 대나무가 많아 수려한 강남의 경치를 보여주는 죽산도(竹山島), 만여마리의 독사가 살아가는 뱀의 왕국 소흑산(小黑山)섬, 돌들이 다양한 벽화의 세계를 만드는 섬 등이 있다.
임해(林海)공원은 산봉과 백사장을 가지고 있는데 산에는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고 건물이 조화를 이루며 만경창파에서는 돛배들이 아름다우며 흰 백사장과 푸른 바다가 한 눈에 안겨온다.
(사진설명: 구장애)
구장애(九丈崖)와 월아만(月牙灣)은 또 다른 경관이다. 구장이나 높은 절벽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 보면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면서 우레같은 소리를 내고 부서지는 바닷물이 하얀 눈같이 쏟아져내린다.
월아만은 특히 반들반들한 자갈로 유명한 곳이다. 이 곳의 자갈은 반들반들하면서도 영롱한 오색으로 찬란하다.
(사진설명: 봉래각과 신기루) 장도는 또한 허상이면서도 진실인듯한 신기루가 자주 나타나는 곳이다. 특히 7,8월이 되면 장도에서는 저 멀리 바다위에 신기루가 자주 모습을 드러내면서 선경을 연출한다.
봉래각(蓬萊閣) 봉래시는 연태시의 관할 구역에 속하는 현급시이다. 연태시에서 서쪽으로 약 75Km 떨어져 있으며, 장도현(長島縣)과 연접하고 있다. 봉래각은 봉래 시가지의 북쪽에 있는 단애산(丹崖山)에 있다. 대해를 바라보며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는 전각은 가히 ‘선경(仙境)’이라 할만하여, 황학루(黃鶴樓), 악양루(岳陽樓), 등왕각(滕王閣)과 함께 중국의 사대명루에 속한다. 역사에 의하면 춘추시대에 봉래는 내자국(萊子國)에 속했으며, 당시에는 봉래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래(萊)’라는 글자는 명아주풀 또는 가꾸지 않은 묵정밭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아마 명아주풀이 무성한 황무지였을 것이다. 지금의 이름은 한무제가 붙였다. 당나라 사람 두우(杜佑)는 《통전(通典)》에서 한무제가 이곳에 와서 바다 가운데 있다는 봉래산을 바라보기 위해 성을 쌓았다고 했다. 한무제가 이곳에 온 것은 불로장생을 위해서였다. 그는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바다 속에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라는 삼신산이 있고, 그 산에는 불로장생약을 가지고 있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곳에 온 그는 발해의 연변에 있는 단애산에 올라가 대해에 있다는 신선을 바라보려고 했다. 신선도 불로장생약도 얻지 못했지만, 그는 신선이 사는 산이 보인다는 이곳에 작은 성을 쌓고 봉래라 불렀다. 당대에는 이곳에 봉래진을 설치했으며, 나중에 등주부(登州府)로 승격시키면서 산해명방(山海名邦)이라 불렀다. 신라와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자 수많은 신라인들이 오늘날 한국인들이 산동성 해안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처럼 등주를 거점으로 활동을 했다. 한무제도 좋고, 보통 사람들도 좋은 것은 이곳 봉래에서 선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해시진루(海市蜄樓) 때문이다. 해시진루는 봉래의 십대선경 가운데 하나로, 이곳 사람들은 신선이 현세에 나타나는 곳이라 부른다. 이러한 정황은 현재 봄과 여름에 나타난다. 전설에 따르면 봉래산은 허무맹랑한 환상의 산이지만, 봉래각에 가보면 그 매혹적인 실체를 구경할 수가 있다고 한다. 신선이 사는 산을 찾지 못한 한무제는 단애산을 신선산으로 만들고 그것을 봉래산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단애산이란 어떤 산인가? 사실 단애산은 그리 높지 않는 꼭대기에 봉래각이라는 건물이 서 있는 해변의 작은 산에 불과하다. 산꼭대기에 있는 붉은 색의 무늬가 새겨진 바위로 뒤덮여 있으며, 송대에 이곳에 봉래각을 다시 수축했다. 산의 절반은 바다속으로 들어가 있으므로 흡사 바다에 떠있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이 산을 두고 산은 높지 않지만 신선이 살고 있기 때문에 유명하다고 한다. 봉래각은 송의 가우(嘉佑) 6년인 AD1061년에 처음 세웠다. 명의 만력 17년인 AD1589년에 순무사 이대(李戴)가 다시 새로운 건물을 증축하고 봉래각이라 불렀다. 청의 가경(嘉慶) 24년인 AD1819년에 다시 수리를 하면서 새로운 건물을 증축했다. 봉래각은 2층이며 높이는 15M이다. 사방에는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2층 정면에 붙어 있는 편액에는 세로로 ‘봉래각’이라는 황금빛 글씨가 새겨져 있다. 청대의 서예가 철보(鐵保)가 쓴 것이다. 안에는 동필무(董必武)와 섭검영(葉劍英)이 쓴 제시(題詩)가 있다. 봉래각은 여조전(呂祖殿), 삼청전(三淸殿), 봉래주각(蓬萊主閣), 천후궁전(天后宮殿), 미타사(彌陀寺) 등을 포함하는 일련의 건축군으로, 총건축면적은 18,900평방M이며, 32,800평방M를 차지하고 있다. 주각 옆에는 소동파(蘇東波)의 시를 돌에 새긴 함련(檻聯)이 들어 있는 소공사(蘇公祠)가 있다. 서쪽에는 두 개의 정자가 있다. 하나는 ‘해시(海市)’라는 시가 새겨진 비석이 누워있는 ‘와비정(臥碑亭)’이고, 다른 하나는 ‘피풍정(避風亭)’이다. 바닷가에 닿아 있으면서 우둑 솟은 이 정자에 앉아 있으면, 바닷바람이 휘파람소리를 내며 거세게 불어도 문풍지 하나 흔들리지 않고 들불을 켜놓아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피풍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자 아래쪽에는 수면에서 몇 M정도 높이에 있는 천연동굴이 있고, 동굴 바깥에는 흡사 사자가 누어있는 듯한 모습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동굴에 앉아 있으면 파도소리가 마치 사자의 울음소리와 같다고 하여 ‘사자동’이라 부른다. 여름철에 비바람이 몰아치면 빗줄기가 동굴에 부딪쳐 한 무리의 물안개를 내뿜는다. ‘사동연운(獅洞烟雲)’이라는 이 장관은 봉래십경 가운데 하나이다. 봉래각 안에 있는 정자와 전각의 회랑과 벽에는 수많은 명사들이 남긴 시와 그림을 새긴 함련, 비문, 석표가 가득하다. ‘제로야인(齊魯野人)’, ‘한녹(漢鹿)’과 같은 석각은 물론, 소동파, 동기창(董其昌), 옹방강(翁方鋼)과 같은 당대 최고의 문인과 서예가들의 글씨를 새긴 비석과 풍옥상(馮玉祥)의 ‘벽해단심(碧海丹心)’이라는 글씨를 새긴 석각도 있다. 서쪽에는 고대의 수북화를 돌에 새긴 것도 있으며, 봉래십대선경인 선각능공(仙閣凌空), 신선현시(神仙現市), 만리징파(萬里澄波), 사동연운(獅洞烟雲), 어량가조(魚梁歌釣), 만곡주기(萬斛珠璣), 일출부상(日出扶桑), 만조신월(晩潮新月), 누천적윤(漏天滴潤), 동정함령(銅井含靈)을 생동감 있게 그른 그림이 있다.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마치 선계에 들어 온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1982년 봉래각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단애선경방(丹崖仙境坊)
원래는 ‘단애승경방(丹崖勝境坊)’이라 부르는 목제 구조물이었다. 청의 광서(光緖) 말년에 훼손되었던 것을 중회민국 초기에 다시 수리하고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1981년 하반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판에 새겨진 ‘단애선경(丹崖仙境)’이라는 글씨는 1964년 중국공산당 부주석 동필무가 봉래각에 왔다가 기념으로 남긴 것이다. 이 석방은 산으로 들어가는 대분에 해당하므로 선계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다. 이 산문을 통과하면 곧바로 단애선경으로 들어간다. 용왕궁(龍王宮) 당의 정관(貞觀) 년간에 처음 지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건물은 1984년에 중건한 것이다. 용왕궁에는 3개의 문이 있다. 정중앙에 있는 대문은 용왕이 다니는 문이고, 양쪽 옆에 있는 작은 문은 새우나 자라와 같은 수행원들이 다니는 문이다. 용왕궁의 앞에 있는 전각은 1993년 5월 1일 새로 지어 개관했다. 양쪽에는 수문신장이 있는데, 동쪽에 있는 신장은 정해신(定海神)이고, 서쪽에 있는 신장은 정해신(靖海神)이다. 모두 용왕이 파견한 신장이다. 정전으로 들어가면 정중앙에 동해용왕 양 옆으로 8명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앉아 있다. 오른쪽으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순해야차(巡海夜叉)는 매일 바다 위를 순찰하다가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용왕에게 보고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그는 동해를 평안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와 마주 보고 있는 간어랑(赶魚郞)은 커다랗고 푸른 천리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수 천리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도 모두 볼 수가 있다. 맞은편에는 간어랑과 형제로 커다란 귀를 가진 순풍(順風)이 있다. 순풍은 수 천 리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3번째 자리에는 섬전낭낭(閃電娘娘)이 있다. 금광성모(金光聖母)라고도 부르는 그녀의 곁에는 뇌공(雷公)이 있다. 민간에서 보통 뇌공과 전모(電母)라 하는 것은 이 둘을 가리키는 말이다. 맞은편에는 풍파파(風婆婆)가 바람을 잔뜩 담은 자루를 들고 다소 심술궂은 표정을 하고 있다. 이 할머니의 기분에 따라서 바람이 거세게 불기도 하고 잠잠해지기도 한다. 그 옆에는 우신(雨神)이 비를 담은 호로병을 들고 있다. 우신이 이 호로병을 거꾸로 들면 많은 비가 내린다. 용왕의 신하들 가운데 어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누구일까? 당연히 간어랑이다.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수많은 물고기가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용왕의 침실 용왕의 양쪽 곁에는 두 명의 왕비가 있다. 일부다처제였던 옛날에 존귀한 용왕이 두 명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여권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오늘날 중국의 여성들에게는 그리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닐 것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용왕의 목조상과 그가 타고 다니는 가마와 지팡이까지 있었다고 한다. 기우제를 지낼 때 사용했던 것들이다. 해마다 가뭄이 들면 고을의 관리들은 백성들과 함께 용왕묘에 제사를 지내고 용왕이 자비심을 베풀어 단비를 내려주기를 기대했다. 제사를 지낸 후 사람들은 버드나무로 만든 모자를 쓰고 용왕묘 주변을 돌면서 비를 내려 달라고 큰 소리로 기원했다. 버드나무로 만든 모자를 쓴 것은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흡사 장대비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했을까? 전하는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또 다른 극약처방을 했다고 한다. 즉 용왕의 조상을 마당에 꺼내놓고 뜨거운 햇볕을 쬐는 것이다. 용왕이 뜨거워서 땀을 줄줄 흘리면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비가 내렸다고 한다. 용왕묘를 처음 지었을 때 부근의 어민들은 제사를 받들어 용왕의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지나면서 향을 피워 기원을 하는 풍습은 사라지고 최근에는 용왕을 모신 사당마저 자구 허물어져가고 있다. 천후궁 정전 송대의 선화(宣和) 4년인 AD1122년에 처음 지었지만, 청대의 도광(道光) 16년에 불이 나서 전소된 것을 도광 17년에 중수했다. 봉래의 천후궁은 중국의 북방에서 가장 큰 천후궁묘당 가운데 하나이다. 궁전의 정중앙에는 황금을 입힌 천후의 조상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그 옆에는 4명의 시녀가 시립을 하고 있으며, 동서 양쪽으로 8명의 관리들이 나열하고 있다. 그 가운데 4명은 해룡왕(海龍王)이다. 동쪽에 있는 4개의 조상 가운데 2개는 해룡왕이고 두 개는 문관이다. 한 문관은 손으로 성지(聖旨)를 받들고 있다. 천제의 듯을 지상으로 하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것이다. 도 다른 문관은 법을 집행한다. 예를 들어서 바닷속에서 자라나 새우와 같은 것들이 풍랑을 일으키면 그가 그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천제에게 보고한다. 그 외에도 바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파악하여 천제에게 보고한 다음 지시를 받아 해룡왕에게 처리하도록 인계한다. 서쪽에도 2개의 해룡왕 조상과 문관의 조상이 있다. 한 문관은 해신들을 관장한다. 다른 문관은 천제의 명으로 반포되는 법령을 반포하기 때문에 손에 인장을 넣은 함을 들고 있다. 천후궁의 천후는 해협 양쪽에 사는 사람들이 받드는 해신이다. 봉래 사람들은 천후를 ‘해신낭낭(海神娘娘)’이라 부른다. 천후의 고향인 보전(莆田)에서는 ‘마조(媽祖)’라고 부르기 때문에, 다른 여러 지방에서는 그녀를 받드는 사당을 ‘마조궁(媽祖宮)’이라 부른다. 천후는 성이 임(林)이고 이름은 묵(黙)이다. 그녀는 복건성 보전현 미주만(湄州灣) 현량항(賢良港)에서 태어났다. 북송의 건륭(建隆) 원년인 AD960년 3월 23일에 출생하여 옹희(雍熙) 4년인 AD987년 9월 9일에 27세를 일기로 결혼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임묵의 부친인 임유각(林維慤)은 원명이 원(源)이었으나 6세조의 이름과 같아서 개명을 했으며, 송초에 복건성 보전의 순금(巡衿)을 지냈다. 어머니 왕씨는 1남 6녀를 낳았다. 임묵은 이들 부부 사이에 막내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임묵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붉은 빛이 방안에 가득 했으며, 향기를 담은 이상한 기운이 넘쳤다고 한다. 임묵이 출생한 후에 한 달이 지나도록 울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을 ‘묵랑’이라 지었다고 한다. 《복건통지(福建通志)》에 따르면 임묵은 8살이 되던 해에 글공부를 하기 시작했으며, 10살이 되었을 때 불경을 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불과 한해가 지나자 그녀가 해독하지 못하는 불경이 없었다고 한다. 하루는 도사 현통(玄通)이 임묵의 집에 와서 그녀를 보고 불성을 갖추었으므로 현미비법(玄微秘法)을 전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곧 도사에게 받은 비법을 모두 익혔다. 16세가 되자 그녀는 우물에서 부서(符瑞)를 얻어 신통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사악한 악귀들을 쫓아내고 세상을 구제하기 시작했다. 어느 해에는 마을에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그녀는 병이 발생한 것은 우물 때문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우물물을 퍼내고 보니 과연 쥐가 죽어서 썩고 있었다. 사람들은 차츰 그녀를 신령스러운 여자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바람을 타고 바다 위를 다니면서 조난을 당한 선박을 구해주기도 했다. 《미주지(湄州志)》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루는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가 바다로 나갔다. 갑자기 거센 서풍이 불어와 파도가 배를 뒤집을 듯이 몰아쳤다. 집안에 남아서 베를 짜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눈을 감더니 얼굴색이 변했다. 그녀는 베틀의 모서리를 잡더니 발로 베틀의 축을 밟고 양쪽 겨드랑에 무엇이가를 끼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어머니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보니 눈을 감고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과 같았다. 어머니가 그녀를 베틀에서 내려놓고 손발을 주무르자 간신히 깨어났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부근을 지나가는 배 2척이 다가가 구했지만 오빠는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고 했다. 다음날 과연 아버지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오빠는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신통하다고 했다. 옹희 4년 9월 9일 그녀는 언니들에게 이렇게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 나는 먼 곳으로 떠납니다. 서운하기 짝이 없지만 다시는 만나지 못합니다.’ 전하는 말에 다르면 그녀는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고 한다.” 임묵이 세상을 떠나자 역대의 관리들과 신하들은 황제에게 주청하여 그녀를 신으로 봉해달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가뭄에는 비를 내려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해주는 신으로 격상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공덕을 과장하게 되자 악귀를 내쫓고 재난과 역병을 물리치는 신으로 변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그녀가 험한 파도를 잠재워 안전하게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었으므로 해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임묵이 죽고 나서 얼마 후에 그녀를 받드는 사당과 궁전이 여기저기에서 생겨났다. 황제가 그녀에게 내리는 봉호도 차츰 높아졌다. 송의 선화 4년인 AD1122년에 먼저 ‘순제부인(順濟夫人)’이라는 칭호를 받은 그녀는 청대의 도광 19년에 ‘천상성모(天上聖母)’로 승격되기까지 황제로부터 수 십 차례 제사를 받기도 했다. 송대에는 여러 차례 부인 또는 비(妃)라는 작위를 받아 인간세계의 궁전에서 살던 여관(女官)의 신분에 머물렀다. 명대에 이르자 사신들이 자주 뱃길로 서양으로 떠났으며, 해상으로 외적들이 침범을 하게 되자 해안선을 따라 대규모의 방어기지를 설치하게 되었다. 군인들은 해안을 순시하느라고 자주 출격을 했으며, 그때마다 그녀를 안전한 항해와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는 신으로 떠받들었다. 황제도 이러한 군인들의 염원을 생각하여 여러 차례 그녀의 작위를 높여주었다. 청나라 조정은 중국을 통일하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농민기의를 진압하면서 민중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녀의 작위를 최고위까지 높여주었다. 강희제(康熙帝)와 건륭제(乾隆帝)는 ‘천후(天后)’로 봉했으며, 도광제(道光帝)는 ‘천상성모(天上聖母)’로 추존했다. 가경제(嘉慶帝)는 무려 30자나 되는 ‘호국비민묘령조응홍인보제복우군생성감함부현신찬순수자독우천후(護國庇民妙靈照應弘仁普濟福佑群生誠感咸孚顯神贊順垂慈篤佑天后)’라는 봉호를 추존했다. 봉래각의 천후궁과 다른 중국 각지의 천후궁의 신을 모신 배신(陪神)의 형태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다른 천후궁에서 볼 수가 없는 것은 봉래각의 천후궁에서는 4명의 해룡왕이 천후를 모시는 관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이다. - 천후궁의 배신은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고사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수신들이 천후를 모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해룡왕이 아니라 호수나 강을 관장하는 신이 천후를 모시는 경우도 있다. - 북송 이전에 해신 즉 4명의 해룡왕은 성품이 흉악하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항상 바다에서 풍랑을 일으키는 존재로 여겼다. 어민들이나 뱃사람들은 이러한 해신을 두려워했으며, 오히려 반감을 품고 있었으므로 신앙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 북송의 선화 4년인 AD1122년, 황제가 대신 노윤적(路允迪)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했을 때, 길을 떠나기 전에 직접 어향(御香)을 하사하여 광덕왕(廣德王)에게 기도를 드리게 했다. 그러나 뱃길로 고려를 향해 가는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 8척의 배 가운데 7척이 침몰하고 말았다. 위험한 상황에서 갑자기 붉은 옷을 입은 여신이 나타나 사신의 생명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신을 생명을 구한 것은 해룡왕이 아니라 여신인 천후였던 것이다. 사신이 조정으로 돌아와 보고를 하니 황제는 먼저 천후를 ‘순제부인’으로 봉하고 사당을 지은 다음 편액을 하사했다. 봉래각 천후궁에는 도광 년간에 세운 비석이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송의 휘종(徽宗) 시대에 처음 천후성모묘(天后聖母廟)를 세웠다. 선화 4년에 다시 사당을 84간으로 증축했다.” 송대 중기 이후에 해신낭낭은 작위가 비(妃)로 격상되어 용왕과 같은 신성(神性)을 부여받게 되었다. 비로소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보호하는 신이 된 것이다. - 원대 이후에 역대의 조정은 해신낭낭을 천비(天妃), 천후(天后), 천상성모(天上聖母)로 봉하자, 그녀는 천산의 관직을 받아 바다를 소란스럽게 하는 요귀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천후의 활동범위가 넓어지자, 그녀는 사해의 용왕을 관장하는 최고의 직위로 승격된 것이다. - 마조의 고향 보전에는 《천비항룡(天妃降龍)》이라는 극본이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천비가 동해용왕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고사를 중심으로 구성한 희극이다. 천후궁희루(天后宮戱樓) 정전을 지나면 작은 전당이 나온다. 송자낭낭(送子娘娘)을 받드는 자손전(子孫殿)이다. 이곳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피워둔 향냄새가 진동을 한다. 원락을 지나면 천후궁의 앞마당이 나온다. 앞마당에는 매년 정월 16일에 봉래시에서 전통적으로 개최하는 천후궁묘회가열리는 희루가 있다. 이날 사방에서 몰려온 사람들은 해신낭낭에게 평안하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정중앙에 걸린 편액에는 ‘관지의(觀止矣)’라는 글씨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 희곡이 시작되면 누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함부로 움직이거나 떠들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란스러우면 해신낭낭이 관람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고, 그것은 해신낭낭에세 불경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 이 홍루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희곡공연은 하늘 아래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소리라는 뜻이다. 무대 양쪽에는 각각 대련이 걸려 있다. 상련에는 ‘악주균천조석성중훤도서(樂奏鈞天潮汐聲中喧島嶼)’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이 희루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천상의 음악과 마찬가지이며, 조수와 석수가 내는 소리와 화음을 이루면서 봉래의 신선이 사는 섬에 가지 메아리친다는 뜻이다. 하련에는 ‘궁개갈석생가대리체봉영(宮開碣石笙歌隊裏砌蓬瀛)’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궁(宮)’은 고대의 5음계 가운데 하나로 음악이 연주될 때 맨 먼저 내는 소리이다. 즉 희루에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면 삼신산까지 들린다는 의미이다. 희루 양쪽에는 각각 홍갈색의 커다란 돌이 3개씩 마주보고 있다. 마치 하늘의 삼태성(三台星)과 같은 모습이다. 삼태성은 태미원(太微垣)에 속하는 별자리로 삼능성(三能星)이라고도 한다. 《진서(晋書) 천문표(天問表)》에 따르면 “삼태천성은 양쪽에 있으며, 서쪽에 있는 2개의 별을 상태(上台)라 하고, 그다음 2개의 별을 중태(中台)라 하며, 동쪽에 있는 2개의 별을 하태(下台)라 한다.”고 했다. 청대의 학자 완원(阮元)은 이 돌을 삼태석(三台石)이라 하고 천후궁의 외벽에 3개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완원은 청대에 호광(湖廣)과 운남(雲南) 총독을 지냈으며, 서예와 금석조각에 대단한 조예가 있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돌에 새긴 예서체로 된 3글자는 그가 남긴 아주 귀중한 작품이다. 이 6개의 돌이 늘어선 모습은 《역경(易經)》의 8괘 가운데 하나인 곤괘(坤卦☷)와 흡사하다. 효(爻)는 괘의 기본적이 부호이며, 팔괘의 변화는 효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이 돌을 곤효석(坤爻石)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마도 산을 깎아 누각을 세울 때 나온 돌을 누군가가 일부러 이렇게 나열한 것 같다. 천후궁 앞에는 마전(馬殿)이 있는데, 가응(嘉應)과 가우(嘉佑)라는 천후를 보호하는 신상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천후가 고향인 미주에서 항복을 받은 요괴였다고 한다. 천후궁의 오래된 홰나무 천후궁의 정전 앞에는 수령이 천 년이나 되었다는 한 그루의 늙은 홰나무가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팔선에 속하는 철괴리(鐵拐李)와 여동빈(呂洞賓)이 이곳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태양빛이 너무 강렬하여 도저히 바둑을 둘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침 철괴리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 자리에 꽂았더니 금방 나무가 자라서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벼락을 맞은 적이 있었지만, 신선이 심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끄떡없이 잘 자란다고 한다. 나무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어졌지만, 가지와 잎은 무성하다. 이 나무의 또 다른 특성은 새싹과 낙엽이 6개월마다 반반씩 번갈아 피고진다는 점이다. 침궁(寢宮) 묘우식(廟宇式)으로 된 누각이다. 침궁의 문 위에는 ‘복석단애(福錫丹崖)’라는 글씨가 있다. ‘석(錫)’은 큰 상을 하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편액의 글씨는 천후낭낭이 단애산에 오는 사람들에게 복을 준다는 뜻이다. 천후가 하사하는 복을 받은 사람은 모든 일이 자기 바람대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침궁으로 들어가면 정중앙에 양쪽으로 시녀를 거느리고 단아하게 앉아 있는 해신낭낭이 있다. 이 누각의 아래에는 동서 양쪽에 침실이 있다. 왜 침실이 두 개일까? 전하는 말에 다르면 해신낭낭은 홀수 날에는 동쪽에서 잠을 자고, 짝수 날에는 서쪽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 해신낭낭을 존중했던 사람들은 그녀가 평소의 습관대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도록 두 개의 침실을 만들어 두었다. 누각의 위쪽은 해신낭낭이 화장을 하는 곳이다. 이 방의 양쪽 문에는 모두 자물쇠가 걸려 있다. 여자가 자는 방에 남들이 함부로 출입을 하지 못하게 걸어 둔 것이라 한다. 침궁이 있는 원락에는 다음과 같은 5언절구로 된 시가 있다. 직상봉래각(直上蓬萊閣), 인간제일루(人間第一樓). 운산천리목(雲山千里目), 해도사시추(海島四時秋). 곧바로 봉래각을 오르니, 인간세상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로구나. 구름과 산은 천 리에 가득한데, 해도는 사계절 모두 가을이로구나. 석각수비(石刻壽碑) 이곳에는 초서로 쓴 ‘수(壽)’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이 있다. 오대시대의 도사 진단(陳摶)이 쓴 것이라 한다. 이 곳은 ‘부(富)’, ‘불(弗)’, ‘림(林)’이라는 세 가지의 컨셉으로 조성되었다. 그 의미는 이렇다. 나무를 잘 심어야 부귀와 장수를 얻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부귀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 즉 나무를 후손들에게 남겨야 후손들이 부유하게 살 수가 있다는 듯이다. ‘수’라는 글자의 서쪽에는 꽃모양의 글씨로 쓴 ‘복(福)’자가 있다. 벽해단심각(碧海丹心閣) 유명한 항일애국장군 풍옥상(馮玉祥)이 쓴 ‘벽해단심(碧海丹心)’이라는 휘호를 새긴 비석이 있다. 9․18사변이후 풍옥상은 중국민족의 대의를 중요시하여 항일이 곧 구국의 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1933년 5월 그는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과 합작하여 민족항일동맹군을 조직하고 차하얼에서 거국적인 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얼마 후에 장개석이 일본군과 합작하여 공격을 하자 그는 쓰라린 패전을 겪어야 했다.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1939년 5월, 풍옥상은 국민당 육군대학의 군사교관이 되어 국민당의 원로 이열균(李烈鈞)과 함께 봉래를 찾았다. 이열균은 당신에게 민족과 주권을 지키기 위한 모든 것을 걸겠다고 했다. 풍옥상은 겉으로는 항일을 주장하면서 몰래 매국적인 행위를 일삼는 장개석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드러내어 말을 하지는 못하고 쓴웃음만 지었다. 이열균은 풍옥상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음과 같은 대련을 휘호로 써주었다. 공좌약석(攻挫若石), 동구단심부사직(同具丹心扶社稷), 강산여화(江山如畵), 전빙적수만건곤(全憑赤手挽乾坤). 돌과 같은 마음 굽히시고, 함께 단심으로 사직을 지킵시다. 강산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은데, 맨손으로 천하를 당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열균은 대련을 내밀며 풍옥상에게 제호를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풍옥상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대련에 ‘벽해단심(碧海丹心)’이라는 4글자의 제호를 써넣었다. 이열균은 풍옥상에게 국민당의 강세를 이용하여 조국을 살리자고 했지만, 풍옥상은 자신의 마음은 푸른 바다와 같고 가슴에는 붉은 피가 살아 있다고 대답하여 정중히 거절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풍옥상의 애국심과 호기를 기리어 그가 남긴 ‘벽해단심’이라는 글자만 따로 비석에 새겨 두었다. 봉래각 주루(主樓) 봉래각은 2층으로 된 목조식 건물이다. 그 가운데 정화는 역시 주루이다. 송의 가우(嘉佑) 6년에 처음 지었으며, 나중에 명청시대를 거치면서 중수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아래층의 정문에 걸린 세로로 된 ‘봉래각’이라는 편액의 글씨는 청대의 서에가 철보(鐵保)가 쓴 것이며, 윗층에도 그의 작품이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장고구(張古舊)가 만든 팔선탁(八仙卓)이라는 탁자가 있다. 8명의 신선이 탁자에 둘러 앉아 술을 마셨다고 하여 “선경은 신선주를 만들었고, 신선주는 신선도 취하게 만들었다(仙境産仙酒), 仙酒醉仙人).”이라고 한다. 건물 안에는 2개의 문이 있다. 왼손으로 작은 문을 열고 위로 올라가면 신선이 된다고 하여 왼쪽 문을 ‘등각성선(登閣成仙)’이라 하고, 구경을 마친 후에 오른손으로 작은 문을 열고 내려오면 신선이 세상으로 내려온다고 하여 오른쪽 문을 ‘선인하범(仙人下凡)’이라 한다. 피풍정(避風亭) 명의 정덕(正德) 8년에 지부(知府) 엄태(嚴泰)처음 지었으며, 당시에는 ‘해시정(海市亭)’이라 불렀다. 정자가 완공된 후 사람들은 이곳이 바름을 피하기에 아주 특별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피풍정’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바다에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이 정자의 안에 있으면 이상하게도 그것을 느낄 수가 없다. 옛날 사람들은 그것이 이곳에 있는 ‘피풍주(避風珠)’라는 구슬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 정자의 삼면에 창문을 만들어 주지 않아서 실내의 공기가 대류를 하지 않는 기류의 사각지대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정자의 앞쪽에 있는 치아 모양의 작은 담장 때문이다. 활 모양의 절벽에 에워진 이 담장 때문에 북풍이 바다로부터 불어와도 절벽 위로 올라가서 정자의 처마를 통과하기 때문에 실내로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내에 촛불을 켜놓아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바람을 피하는 효과는 자연환경을 그대로 두고 절묘하게 건물을 지은 건축기술 때문이다. 이 정자 안에는 25점의 각석이 있는데, 그 가운데 9점은 등주의 군사령관 원가력(袁可力)이 지은 《관해시(觀海詩)》를 명대의 서예가 동기창(董其昌)이 쓰고, 당대 최고의 석각가 온여옥(溫如玉)이 새긴 작품이다. 이 9점의 석각은 주련벽(珠聯璧)과 함께 봉래각의 삼절이라 부를 만하다. 1934년 풍옥상도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해불양파(海不揚波) 청왕조의 만주인 탁혼포(托渾布)가 쓴 글씨로 기세가 웅혼하고 위엄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불(不)’이라는 글자의 한 쪽 모서리가 파손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글씨는 나중에 파손된 부분을 보완한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했을 때 산동순무 탁혼포는 해안방어를 위해 봉래에 왔다. 봉래각에 오른 그는 끝없이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감동을 느껴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 않기를’이라는 뜻을 지닌 ‘해불양파’라는 4개의 글자를 휘호로 남겼다. 적의 침략으로 시끄럽게 변한 바다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을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봉래도 전쟁의 와중에 빠져들었다. 1895년 1월 18일 일본군의 함대에서 발사한 대포 한 발이 이 글씨에 명중하면서 ‘不’이라는 글자가 깨어지고 말았다. ‘海不揚波’가 ‘海揚波’로 변한 것이다. 이로써 강성한 국가와 강대한 해양방위를 염원했던 탁혼포의 바람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와비정(臥碑亭) 와비정은 정자 안에 있는 비석이 옆으로 누워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정면에 새긴 것은 소동파가 초서로 쓴 《제오도자화후(題吳道子畵后)》이며. 뒷면에 새긴 것은 쓴 《등주해시(登州海市)》로서, 그의 초서 솜씨를 유감없이 감상할 수 있는 명품이다. 처음 시작하는 글씨는 크기가 작고 반듯하여 마치 깎아놓은 밤톨과 같지만, 년관(年款)을 전후로 한 글씨는 서풍이 완연히 달라서 쓸 때 당시 그의 기분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 독특한 흥미를 느끼게 한다. 문물 감정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년관의 뒤에 있는 5줄의 글은 소동파의 또 다른 문장 《발오도자지옥변상(跋吳道子地獄變相)》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추리를 해보면, 원래 《등주해시》를 새기고 나서 무엇인가 미흡하여 뒷면에 《제오도자화후》를 새기고, 다시 전면에 새긴 시가 차지하는 면적이 너무 작다고 생각하여 《발오도자지옥변상》 가운데에서 적당한 의미를 지녔다고 판단되는 5줄을 골라 새겼을 것이다. 내용이 흡사하여 후세 사람들은 두 문장을 하나로 감상할 수가 있다. 소공사(蘇公祠) AD1578년에 수축했다. 소동파는 1085년에 등주로 발령을 받아 10월 15일에 도착했으며, 불과 5일 후인 10월 20일에 다시 변경(卞京)으로 돌아갔다. 짧은 5일 동안이지만 그는 민정을 깊이 살펴 이해를 했다. 그는 이 지역 백성들의 고충과 당시에 반포된 왕안석의 신법으로 백성들이 소금을 판매하는 것이 금지되어 소금생산업에 종사하는 많은 백성들이 고충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동파는 《흘파등래각염장(屹罷登萊榷鹽狀)》에서 이와 같은 많은 사실을 열거하고 그 이폐(利弊)를 설명하여, 황제로부터 백성들이 소금을 판매해도 좋지만 관청에서 세금을 거두도록 하는 개정령을 반포하도록 설득했다. 이곳 사람들은 이러한 소동파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소공사를 지었다. 후대의 어떤 사람은 “5일 동안 지부를 지냈지만, 소공사는 천 년을 이어 간다.”라는 시를 남겼다. 여조전(呂祖殿) 팔선 가운데 여동빈(呂洞賓)을 받드는 곳으로 벽을 사이로 삼청전(三淸殿)이 있다. 삼청전은 도교에서 신봉하는 3분의 신을 모신 곳이다. 가운데 있는 분은 원시천존(原始天尊)으로 붉은 구슬을 손에 들고 있다. 우주가 형성되기 전에 혼돈상태를 상징하며, 도교에서는 원시상태라고 부른다. 왼쪽에는 도덕천존(道德天尊)으로 음양선(陰陽扇)이라는 부채를 손에 들고 있으며, 우리가 노자라고 부르는 분이다. 세계가 처음 형성되고 만물이 나타난 상태를 상징하고 있으며, 도교에서는 태초단계라고 부른다. 오른쪽에 있는 분은 영보천존(靈寶天尊)으로 음양경(陰陽鏡)이라는 거울을 손에 들고 있다. 세계가 혼동상태에서 음양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삼청전에 분향을 하기 시작한 것은 진한시대라고 한다. 옛날부터 줄곧 장씨(庄氏) 성을 가진 도사가 이곳을 지켰다고 한다. 그의 조상은 진시황이 분서를 했을 때 동쪽으로 도망쳐서 제나라 땅에 이르러 도사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삼청전 앞에는 문을 지키는 신이 있는데 형장(哼將)과 합장(哈將)이라고 부른다. 완쪽에 있는 코가 아주 큰 것이 형장으로 검은 기운을 내뿜으며 사람의 혼백을 빨아들인다고 한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합장으로 입술이 대단히 크다. 황색 기운을 내뿜으면 사람들의 혼백이 흩어진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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